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책 속에 나타난 화장실(18)

* 중세 유럽 왕실의 응접실처럼 꾸며놓은 세트장에서 촬영이 시작되기 직전, 재인이 화장실에 가겠다고 나섰다. 내 옆구리를 쿡 찌르며 자기 가방을 들고 따라오라고 했다. 화장실에 들어서자마자 문을 걸어 잠그더니 그녀는 정신없이 가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딱, 한 대만."

그녀의 손가락 사이에 가느다란 담배 한 개비가 끼워져 있었다. 라이터의 주홍 불꽃이 명멸했다. 웨딩드레스로 몸뚱이를 칭칭 감싸고서, 화장실 벽에 엉거주춤 기대선 자세로 담배를 피우는 여자내 친구 재인. 그녀가 내뿜는 창백한 연기 때문에 눈이 아렸다. 나는 슬며시 시선을 돌렸다. 우리가 가 닿으려는 곳이 어디인지, 우리가 제발 알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출처: 달콤한 나의 도시, 정이현 지음>

 

728x90